[e대한경제=임성엽 기자]윤석열 정부의 조달청이 규제 혁신에 올인하고 있는 가운데 정작 공사비 삭감 장치에 대해선 눈을 감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겉으로는 규제 혁신을 외치고 있는 것과 달리 안에서는 대표적인 그림자 규제에 손을 놓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4일 조달청과 건설업계에 따르면 최근 조달청이 개찰한 종합심사낙찰제, 종합평가낙찰제 등 300억원 이상 기타공사에서 최저가 투찰자가 종합심사 1순위 회사를 꿰차는 일이 속출하고 있다.
지난 10일 개찰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의료원 급성기 병상 증축사업 건축공사’ 심사 1순위 회사는 3개사 중 최저가로 써낸 S회사(308억원)가 차지했고, 앞서 8일 개찰한 ‘시흥시 문화예술회관 및 아동회관 건립공사’도 5개 회사 중 최저가를 써낸 H회사(292억원)가 심사 1순위사로 선정됐다.
조달청에 따르면 300억원 이상 기타공사 입찰은 입찰금액 1순위 회사가 심사 1순위 회사로 선정, 종합심사 과정을 거친다. 입찰금액은 입찰참가자 중에서 균형가격에 근접한 자가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개찰된 조달청 기타공사 입찰을 보면, 균형가격이 아니라 최저가 투찰자가 속속 심사 1순위사로 선정된 것이다.
이는 국내 발주기관 중 조달청만 운영 중인 88% 규정 때문으로 분석된다.
실제 조달청은 기획재정부 계약예규도 아닌, 자체 ‘조달청 공사계약 종합심사낙찰제 심사세부기준’을 통해 예정가격의 100분의 88을 초과하는 경우, 균형가격 산정에 포함하지 않고 있다.
특히, 모든 입찰금액이 88%를 초과해 입찰금액이 제외되면 예가의 88%를 균형가격으로 산정한다.
이에 제주도 서귀포의료원 급성기병상 증축사업 건축공사 입찰참여 3개 회사 모두 88%를 초과해 최저가 투찰자가 심사 1순위 회사가 됐다.
시흥시 문화예술회관 및 아동회관 건립공사도 유일하게 88% 선에 투찰한 회사가 심사 1순위 회사로 선정된 것이다.
이는 원자재 급등으로 원가율이 최악을 달리는 공공건설업계의 현실과 맞지 않을뿐더러, 기업들의 소신투찰까지 저해하는 대표적 저가투찰 유도 장치로 꼽힌다.
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한국도로공사, 국가철도공단, 한국수자원공사 등 국내 어떤 발주기관도 이러한 불공정 규정은 운영하지 않는다”며 “현재 실행률, 건설자재 급등으로 고통받는 건설업계 상황은 ‘나 몰라라’하고 무조건 입찰금액의 12%는 후려치겠다는 게 조달청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조달청의 이 같은 조치는 ‘그림자 규제’ 혁파를 외쳐온 이종욱 청장과는 정반대의 행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 이 청장은 부임 후 ‘현장·체감·대안’의 3대 원칙에 따라 불합리한 업무 처리, 부당한 비용 전가 등 조달 현장의 관행적 규제를 발빠르게 발굴해 개선하고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특히, 조달청은 지난 7월 민관 합동 조달현장 규제혁신위원회를 발족하고, 국민 공모, 전문가·기업 간담회 등을 통해 최종 138개의 규제혁신 과제를 발굴했다고 하지만, ‘88% 룰’에 대해선 어떠한 조치나 개선 의지도 없는 게 현실이다.
건설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88% 규정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조달청의 규제개혁 과제로 당연히 올라가야 한다”며 “다른 발주기관의 경우 300억원 이상 건축 입찰은 낙찰률이 98∼99% 선에서 형성되고 있다. 조달청 공사도 정상 실행률이 90% 중반은 나와야 하는데, 88% 규정 때문에 원가 손실이 막심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임성엽기자 starle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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