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업체 부도와 가압류로 인한 공사중단 문제는 건설현장의 골칫거리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원청 건설사는 협력업체의 부도,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 가압류 등과 무관하게 공사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고, 협력업체와 자재ㆍ장비업자도 현장과 무관한 타 채권자의 공사대금 가압류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상생 방안이어서 주목된다.
20일 대림산업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28단독(판사 김인택)은 최근 H사가 대림산업을 상대로 낸 채권 추심 소송에서 “원고(H사)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이 사건은 대림산업이 시공을 맡은 ‘춘천 NHN 지식정보캠퍼스 신축공사’의 커튼월 공사를 하도급한 L사에 대해 자재업체인 H사가 “타 현장에서 L사로부터 공사대금 9890만원을 받지 못했다”며 이 공사대금에 대한 압류 및 추심명령을 대림측에 통보하면서 시작됐다.
일반적으로 건설공사를 종합관리하는 시공사들은 협력업체 부도, 가압류 등으로 인한 자재ㆍ장비업자 등에 대한 체불과 이로 인한 공사 중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업체와 ‘직불합의서’를 쓴다. 이는 협력사의 체불 발생시 원청 건설사가 하도급대금을 자재ㆍ장비업자 등에게 직접 지급한다는 합의다. 임금 체불로 인한 공사중단 사태를 막기 위한 보완책이다. 하도급법(14조)과 근로기준법(44조의 3)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건설산업기본법도 원도급자가 하도급지급보증서나 직불합의서를 발주자에 제출토록 의무화하고 있다.
하지만 직불합의서는 미래에 발생하는 (가)압류에 대해선 효력이 없다. 지난 2008년 대법원이 “향후 발생될 기성금까지 직불합의로써 협력업체 채권자들의 (가)압류에 대항할 수 없다”고 판결했기 때문이다.
김순태 대림산업 법무지원팀 차장은 “상당수 건설사와 채권단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직불합의서만으로 가압류에 대항할 수 있다고 잘못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림산업은 2013년 12월 NHN 지식정보캠퍼스 커튼월 공사에 참여하는 L사와 자재ㆍ장비업체 15개사 간에 ‘채권양도합의서’를 썼다. 직불합의서 대신 채권양도합의서를 현장에 적용한 사실상 첫 사례다. 이 공사의 협력업체인 L사(양도인)가 원청사인 대림산업(제3 채무자)으로부터 장래에 받아야 하는 공사대금채권을 자재ㆍ장비업체(양수인)에 양도한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하면 협력업체를 상대로 타 업체가 공사대금 압류ㆍ추심을 해도 자재ㆍ장비업체에 공사대금을 직접 지급할 수 있게 된다.
실제 대림은 H사의 가압류를 뚫고 자재ㆍ장비업체에 49억원 가량의 대금을 정상 지급했다. 그리고 서울중앙지법은 채권양도합의서를 근거로 H사의 추심 요구에 응하지 않은 대림산업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봤다.
김 차장은 “채권양도합의서를 현장에 적용한 후 법원이 그 정당성을 확인해준 사실상 첫 판례”라며 “악의적인 협력업체 채권자의 근거없는 가압류의 고리를 끊는 효과가 크다”고 말했다.
대림산업은 시범운영을 거쳐 지난해 상반기부터 채권양도합의서를 200여개 모든 현장에 원칙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채권양도합의서의 현장 적용을 주도한 김 차장은 이를 <건설현장 법무실무>라는 책으로 엮었고 현재 이를 주제로 석사 논문을 쓰고 있다.
대한건설협회 관계자는 “최근 건설경기 악화로 협력업체들의 체불사태가 빈번해지면서 자재ㆍ장비업체와 노무자들은 임금 체불에 시달리고 원청사들은 공사 중단과 협력사 재선정 등 고충이 크다”며 “채권양도합의서에 기반한 하도급 대금지급시스템을 확대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건설현장의 고질적인 대금체불은 줄어드는 추세지만 다른 산업에 비해 여전히 많은 편이다. 2011∼2015년까지 임금체불을 신고한 건설근로자 수는 연평균 5만8900여명에 달하고 체불액수도 1600억∼2400억원 규모다. 이 가운데 80% 가량이 건설현장 말단에 위치한 자재ㆍ장비업자에 대한 체불이다.
김태형기자 kth@<건설을 보는 눈 경제를 읽는 힘 건설경제-무단전재 및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