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A건설사의 국내영업담당인 김진수(가명·48) 부장은 지난 5월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답답해온다. 그날 아침 팀회의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려던 오전 10시30분쯤 검찰 수사관들이 예고없이 들이닥쳤다. 수사관들은 4대강살리기 사업 관련 입찰 서류와 컴퓨터 자료를 압수하기 시작했다. 30분 뒤인 11시에는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관들이 사무실을 급습했다. 검찰과 공정위가 동일 기업을, 같은 시간대에 조사를 진행하는 초유의 사태로 인해 곳곳에서 수사관과 조사관, 직원들이 뒤엉켰다.     #2.  수자원 전문 토목설계회사를 운영하는 박찬욱(가명·51) 대표는 요즘 호주 이민을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4대강사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수개월 동안 셀 수 없을만큼 공정위와 검찰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다 끝난 줄 알았더니 이번엔 감사원이 국토부를 통해 4대강 관련 자료를 요청해왔다. 그가 각종 조사에 응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회사는 팀장들 주도로 비상운영체제로 전환했다. 박 대표는 “그동안 세금 꼬박꼬박 내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한국에서 사업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공정위를 비롯해 검찰과 감사원이 건설사들을 상대로 수개월 넘게 토끼몰이식 조사를 강행하면서 건설업계가 업무차질 등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다.  4대강사업 1차 턴키(설계·시공 일괄입찰)를 시작으로 총인처리시설, 2차 턴키에 이어 최근에는 인천도시철도 2호선 , 원주~강릉 복선전철사업 등으로 조사대상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이날부터 인천도시철도 2호선 입찰담합 의혹이 있는 건설사들을 상대로 당사자 및 참고인 조사를 시작했다. 전체 16개 공구 중 2개 공구에서 입찰담합 조사를 벌였던 공정위는 최근 조사를 전 공구로 확대했다. 조사대상만 20여개사가 넘을 전망이다.  원주~강릉 복선전철사업 조사는 철도시설공단의 신고가 발단이 됐다. 입찰에 참가한 35개사 중 H건설 등 4개사가 신고대상이지만 공정위는 조사범위를 계속 넓혀가고 있다.  공정위는 이번 조사를 계기로 철도공단이 최근 5년간 발주한 사업 전반에 대한 담합조사를 벌이기로 했다. B건설사 관계자는 “조사범위를 넓혀서 ‘한 놈만 걸려라’식의 무차별 쌍끌이 포획방식을 택하면 조사기관은 성과를 낼 수 있겠지만 무고한 업체들까지 유무형의 피해를 입게 된다”고 말했다.  ◇사정기관 경쟁하듯 건설사 타깃조사  4대강 사업은 공정위와 감사원, 검찰이 한꺼번에 조사를 벌이면서 범사정기관 간 경쟁 양상마저 띠고 있다. 공정위는 지난해 6월 4대강 1차 턴키와 관련, 8개 건설사에게 111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했지만 검찰 고발은 하지 않았다. 그러자 검찰은 시민단체의 고발을 계기로 수사에 착수, 1차 턴키는 물론 4대강사업 전반으로 수사 범위를 넓혔다. 감사원은 최근 4대강사업에 대한 감사결과에서 국토부의 입찰담합 묵인, 공정위의 부적절한 사건처리 등 정부기관의 조치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공정위 한 관계자는 “검찰의 수사와 감사원의 감사결과를 보고 공정위 내부에선 일부 4대강사업에 대한 강경기류가 감지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공정위는 턴키 1차 조사 때 이미 무혐의로 결론내린 2차 턴키도 다시 조사하고 있다. 조사기관들은 이미 했던 조사를 2~3번씩 반복하고, 해당 기업들은 피로도가 극도로 높아지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공정위는 4대강사업과 철도공단 사업 외에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최저가낙찰제 아파트 건설공사 입찰담합 사건도 조사 중이다. 조사대상은 15개사에서 꾸준히 확산되고 있다.  ◇조사대상만 100여곳…“생존경쟁 소홀할 판”  건설업계에선 공정위와 검찰, 감사원 등의 조사를 받은 건설기업들이 100여개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조사대상이 넓어지고 조사기간이 길어지면서 정상적인 기업활동마저 제약받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사정기관 조사에 매달리다보니 정작 건설산업 위기를 뚫고 나갈 생존경쟁에 주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C건설사 관계자는 “공정위 다녀간 후 검찰이 다시 한번 훑고 지나가고, 나중에 감사원까지 자료를 내놓으라고 한다”며 “비상경영체제 속에 생존경쟁을 벌여야 할 판국에 사정당국에 대응하느라 진을 빼고 있다”고 토로했다. D건설사 관계자는 “일부 자료는 하드웨어 카피할 시간이 없다며 컴퓨터를 통째로 들고가서 정상적인 업무마저 힘들다”며 “조사받는 ‘병(丙)’ 입장에선 자료를 돌려달라고도 못한다”고 말했다.  지난 정부의 국책사업 재조사 등 지나치게 과거에 매몰돼 산업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우려도 나온다. 최장 12년까지 처분시효가 늘어난 공정위 조사기간도 너무 길다는 지적도 있다. 공정위는 지난해 법을 바꿔 공정거래법상 금지행위의 처분시효를 행위종료 시부터 5년에서 7년으로 연장했다. 또 공정위가 뒤늦게 조사에 착수한 경우에는 조사개시일로부터 5년 내에 시정조치나 과징금 처분이 가능하도록 했다. 김태형기자 kth@ 〈앞선생각 앞선신문 건설경제-무단전재 및 배포금지〉